게으름에 대한 찬양

🔖 게으름에 대한 찬양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 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가 시간에 지쳐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류의 오락거리들만 찾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우리 시대 청년들의 냉소주의

어느 정도 만연된 회의주의는 지적 원인보다는 사회적인 원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 주요 원인은 언제나 힘이 없는 것에 대한 위안이다.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증오란 것은 다른 강한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일련의 믿음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교육과 민주주의와 대량 생산이 등장하기 전까진 어느 곳에서나 지식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뇌들이 쓰러졌더라도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인들은 대단히 달라진 상황에 처해 있다. 선전가가 되거나 법정의 어릿광대가 되어 어리석은 부자들에게 서비스를 팔 마음이 있다면야 좋은 일자리와 높은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힘들진 않다. 대량 생산과 초등 교육으로 인해 어리석임이 문명의 발흥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

지식인들이 볼 때 자신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대가를 주는 정부나 부자들의 목적이 해롭기까진 않다 하더라도 불합리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약간만 냉소적으로 되면 그 상황에 자신의 양심을 맞출 수가 있다.

물론 대단히 존경할 만한 작업을 권력이 원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미국의 경우 그 가운데 으뜸이 과학이고 그 다음이 공공 건축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받은 교육이 문학적인 것이라면 - 이것은 너무도 흔한 경우다 - 그는 22살이 되었을 때 자신이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방법으로도 발휘할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서구에서조차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그 사회의 전폭적인 승인과 더불어 자신의 최대 기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대의 지식인들 가운데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진단이 옳다며 ㄴ곰ㄱ사나 선생들이 낡아빠진 미신의 녹슨 병기고에서 낚아 올린 이상들보다 좀더 나은 이상을 설교하거나 젊은이들 앞에 제시하는 것만으론 현대의 냉소주의는 치유될 수 없다.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창조적인 충동을 구체화하는 직업을 찾아낼 수 있을 때만 치유가 가능하다.